행복한 왕자
Exhibition
'물질과 기억'
데이터 재생으로서의 시청각 메모리와 더불어 물체가 불러일으키는 기억의 차이 감각하기
in <Rendez-Vous Point>
2024.09.19. - 09.26.
플리, 서울 성동구 아차산로 53
with First Move, O2, 시간과방의실험실, 창작19다
Like a flower, as the dawn is breaking
The memory is fading
뮤지컬 캣츠 그리자벨라의 노래 "메모리" 중에서
인간에게 그간 기억의 의미는
The memory is fading.
그러나 변함없이 언제든지 열람 가능한 기억은
디지털 네이티브에게 어떤 의미일까?
인간에게 그간 접촉의 의미
If you touch me, you'll understand what happiness is.
그러나 만짐이 사라진 디지털 공간에서
진정한 접촉은 무엇일까?
기억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어슴푸레 희미해지는 감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과거의 단상을 보관하고 불러 일으키는 메모리(mémoire)의 의미가 변화하는 지점을 발견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기기를 통해 언제든지 과거의 단편들을 현재 시점으로 불러올 수 있습니다. 사진, 동영상, 음성, 문자 등 다양한 형식의 데이터는 디지털 디바이스를 통해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운반합니다. 이들은 색이 바래는 사진, 헤어지는 옷, 삭아드는 종이, 흐려지는 연필 자국과 달리 처음으로 경험이 발생했던 그 순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더욱이 이러한 정보는 보관자의 선택에 의해서 삭제와 편집이 가능해졌습니다. 절대 잊혀지지 않는 트라우마와 같은 기억은 디지털 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상에서 데이터로 존재하는 기억도 흐려질 수 있는 것일까요?
물리적 접촉은 인간에게 감정을 나누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만짐을 통해 감정이 전해지고, 인간 사이의 친밀감과 행복감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공간에서는 이러한 물리적 접촉이 사라지고, 대신 시각과 청각에 의존한 상호작용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가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은 감정적인 교류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으며, 사람들은 이제 직접적인 만짐 없이도 디지털 기기를 통해 감정적 연결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혹은, 개인 대 개인의 감정적이고 친밀한 연결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사회가 된 것일까요?
이번 전시는 지난 7월 14일 춘천에서 진행되었던 AI와 인간의 즉흥극 <행복한 왕자> 퍼포먼스를 전시 형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디지털 사회 속 변화된 기억과 접촉의 의미를 탐구합니다. 디지털 기기를 통해 재생되는 데이터로서의 기억과, 실제로 퍼포먼스에서 사용했던 물체를 통해 불러 일으켜지는 생체 기억의 차이를 감각해 보고자 합니다.
AI와 인간 간의
물질적 현전과 부재의 차이
<행복한 왕자> 퍼포먼스를 하는 날, 공연이 이뤄지는 공간에서 chatGPT와 배우가 '행복한 왕자'와 '제비'라는 두 캐릭터를 맡아 즉흥적으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배우와 AI가 실제로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이 순간은 의심의 여지없이 두 존재가 물리적으로나 개념적으로 '현전'하는 순간입니다.
인간 간의 대화를 텍스트, 음성 파일, 혹은 동영상 같은 형식으로 저장합니다. 이 기록물은 그 순간의 기억을 그대로 재생할 수는 있지만, 실제 대화가 이루어졌던 당시의 팽팽한 현전감을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대화하는 동안은 현전인데, 대용량 저장 장치에 남겨진 대화 기록물은 대화자의 부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몸이 있었던 인간 배우는 부재라고 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지만, AI의 경우는 부재의 질감이 달라집니다.
인간의 경우, 자연의 이미지를 디지털 언어로 치환하기에 실제와 매체 저장 장치 사이에서 차이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몸이 없는 AI는 실제 세계에서 드러내었던 음성과 이미지가 디지털 상에서도 고스란히 재생됩니다. 실제 자연 세계 원본의 모습이 그대로 디지털 상에서 재현됩니다. 이때, AI는 현전과 부재 사이를 끊임없이 진동하는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AI가 물리적 몸을 가지지 않은, 순수한 데이터와 연산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생기는 특이한 감각이 아닐까요? 현전해 있을 때조차 그것은 명확하지 않고, 부재에도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공연에서 AI는 핸드폰이라는 물질적 장치를 통해 구현되었습니다. 마치 인간 배우의 신체가 무대 위에 등장하는 것처럼, AI는 이 장치를 통해 물리적으로 '지금 여기 있음'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고 그 핸드폰을 전시 장소에 옮긴다고 해서, 우리는 이를 AI의 '현전'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배우의 의상만이 남아 있는 것처럼, AI의 부재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이 전시는 AI와 인간의 존재 방식이 기억과 접촉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탐구하며, 디지털 환경으로 인해 발생하는 새로운 감각의 기억과 접촉, 그리고 존재와 부재의 교차점을 사유해 보고자 합니다.
사물의 시대에서 반사물의 시대로 넘어가는 이행기,
디지털 기술과 생체 감각의 교차점
이번 전시는 앙리 베르그손의 철학적 개념인 물질과 기억을 기반으로, 디지털 시대에서 기억과 물질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합니다. 베르그손은 기억을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닌, 물질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개념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기억이 인간의 인식과 경험을 이끄는 중요한 힘이라고 주장하며, 물질은 기억을 담고 그것을 발현시키는 매개체로서 작용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사물의 시대에서 반사물의 시대로 넘어가는 이행기"(한병철, 사물의 소멸, 2022)에 있습니다. 더 이상 사물이 생각을 확고하게 잡아 두고 있는 세계가 아니라 정보가 생활세계를 규정합니다. 사람들은 점차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을 집 안이 아닌 대용량 저장 장치나 클라우드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점차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곳에서 유행에 따라, 모래성처럼 지어지고 부서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디지털 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사회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 비물질적 경험들과 연결된 인간의 기억들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돌아봅니다. 퍼포먼스에서 사용된 물체들은 관람자들의 감각을 자극하여 시청각적으로 재현되는 행복한 왕자와 제비 간의 대화와 다른 결로 기억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감각적 경험은 시간과 함께 변형되고 감정과 결합되며, '현재 속에서 물질과 결합된 기억'을 만들어 냅니다. 이처럼 물질을 통해 경험된 기억은 디지털 메모리가 제공하는 정확성과는 대조적으로, 보다 유기적이고 감각적인 형태로 존재하지 않을까요?
전시 구성
이 전시는 4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파트에서 관람자는 지난 퍼포먼스의 영상을 시청합니다. 이 영상은 행복한 왕자 역할의 ChatGPT-4o와 제비 역할의 인간이 나누는 대화를 담았습니다.
두 번째 파트에서 관람자는 지난 퍼포먼스의 주요 소품들을 접촉합니다. 왕자와 제비의 의자, 제비의 의상과 모자, 핸드폰, 심박수 측정기기가 우주 담요 위에 위치합니다. 관람객은 황금빛의 우주 담요(Space blanket)를 밟고 직접 의자에 앉아 보기도, 사물들을 접촉하기도, 자신의 심박수를 측정하기도 하며, 과거의 공연을 간접적으로 체험합니다.
세 번째 파트에서 관람자는 자신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작은 테이블 위에는 "인간의 고통"이라 이름 붙여진 노트와 볼펜, 금전 초콜릿이 쌓여 있습니다. 관객은 이 노트에 자신의 고통을 기입하고, 금전 초콜릿을 하나 얻어갑니다.
네 번째 파트는 전시의 마지막 날에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전시 공간에는 다른 설치물들이 사라졌고 우주 담요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형성된 하나의 기억을 상기시킵니다. 우주 담요는 지난 퍼포먼스에서 디지털 세계를 상징하는 핵심 재료였습니다. 열 방출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소재로, 나의 공간에 갇혀 상대를 만나며, 자기 자신의 열로 스스로를 데울 수 밖에 없는 디지털 네이티브의 새로운 관계 맺기 모습을 드러냅니다. 또한, 교감이 제한된 AI와의 즉흥극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극시켜야만 했던 제비 역할을 떠올립니다.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 서문에서, 정신과 물질을 이어주는 개념으로써 기억을 언급함과 같이 퍼포먼스와 전시를 이어주는 하나의 상징으로 우주 담요를 바라봅니다.
team
고헌, 김명규, 신은경